한국이 미국과 맺은 3,500억 달러 펀드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매년 260억 달러(약 36조 원)에 달하는 추가 관세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는 메리츠증권의 보고서가 공개됐다. 보고서는 단순 비용 문제가 아니라 수출 산업 경쟁력과 외환시장 안정성까지 위협할 수 있는 ‘경제 재앙 시나리오’를 경고했다.
이재명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에게 만년필 선물 (워싱턴=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방명록 작성 때 쓴 만년필을 선물하고 있다. 2025.8.26 [공동취재] xyz@yna.co.kr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이 42일 내 3,500억 달러를 SPC 법인 계좌에 현금 출자(cash injection) 하기를 요구했다. 반면 한국은 보증 금융 패키지 형태를 선호해 양측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3,500억 달러는 한국 외환보유액 4,163억 달러의 84%에 달하는 규모로, 단순히 자금을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이다. 메리츠증권은 “한국이 현금을 납부하지 못하면 관세율이 현행 15%에서 25%로 복귀할 것”이라며 “이 경우 연간 관세 부담액은 약 249억 달러에서 510억 달러로 늘어나게 된다”고 분석했다. 즉 추가 부담액만 260억 달러에 달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자동차 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는 자동차보다 마진이 높다”고 언급하며 반도체·의약품 등 주요 수출 품목에도 고율 관세를 부과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보고서는 “관세가 25%로 유지되면 한국 GDP 성장률이 0.3~0.4%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며 “자동차와 부품에 국한된 수치이며, 반도체와 의약품까지 포함되면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과의 비교도 한국에 불리하다. 일본은 외환보유액이 1조 3천억 달러에 달해, 5,5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하며 미국과 관세를 15%로 낮추는 유리한 조건을 확보했다. 관세가 낮아진 일본 자동차는 글로벌 시장에서 더 큰 경쟁력을 얻게 된 반면, 한국은 25% 관세가 유지되면 상대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보고서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외환보유액의 절반 이상을 쏟아부어야만 협상 조건을 충족할 수 있다”며 “현금 납부가 어려운 상황에서 대안이 없으면 수출 시장에서 구조적 열세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보고서는 “관세는 단순히 사라지는 비용인 반면, 3,500억 달러 펀드는 투자금이므로 장기적으로 회수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펀드 구조상 초기에는 한·미가 이익을 5대5로 나누고, 원금 회수 이후에는 미국이 90%, 한국이 10%를 나누는 방식이다. 즉 매년 관세를 내는 것보다 펀드 투자로 회수 가능한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익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한국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외환보유액 한계와 경제 규모 대비 투자 여력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보고서는 “협상이 결렬될 경우 관세 부담뿐 아니라 원·달러 환율 약세, 무역수지 악화, 외환시장 불안이 복합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며 “정부는 보다 정밀한 시뮬레이션과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한국은 두 가지 선택지 앞에 놓여 있다. 3,500억 달러를 마련해 투자 펀드에 참여하거나, 이를 거부하고 매년 수십조 원 규모의 관세 폭탄을 감수하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관세 납부가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수출 산업 경쟁력 상실과 국가 경제 불안이라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판단이 요구된다.